유라쿠초에 뜬 별_by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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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쿠초에 뜬 별
1945년 8월 패전  직후의 일본인들의 생활은, 산 입에 거미줄  친다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참혹했다.  전시중의 식량부족 문제는 해소되기는커녕  식량위기 상태
로 치달았다. 특히 주식인 쌀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1945년도 소요량은 7,500만
석이었으나 생산량은 53퍼센트에  불과한 4,000만 석이었다. 전쟁 말기였던 1945
년 7월에 이미 주식의 배급량은  어른 1인당 1일 2홉 3작에서 2홉 1작으로 줄어
들었고, 그것마저 배급이 곤란하여 쌀의 대용으로 잡곡이나 고구마가 섞였다. 그
뿐만 아니라 배급  지연이나 배급 중단이 일상화되었고  굶어 죽는 사람도 생겼
다. 배급만으로 연명할  수 없던 도시인들은 입든 옷을 싸들고  농촌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거나 암시장에서 융통할 수밖에 없었다.  여북했으면 풀을 건조시켜 가
루로 빻아 빵을 만들어 먹었을까. 점령군들이  밀반출한 물자가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와 천문학적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여자들은 이같은 암담한  시기에 육체가
장사 밑천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반반하게 생긴 아가씨들이 미군
장교들의 현지처로 들어앉았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하기야
일본 여자들이  미국 사람의  애인 노릇을 한  것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1859년 초대 주일 특명 전권  미국 공사로 부임했던 타운센드 해리스(Townsend
Harris) 공사가 약혼한  일본 아가씨 오키치를 현지처로 삼은 일은  유명한 이야
기이다. 해리스  공사는 암시장에도  관계했던 「추악한 외교관」으로  기록되고
있다.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는 예외없이 밤의 공주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미군
독신자 장교 숙소가 가까운 유라쿠초에 어둠이 내리면 허름한 옷자림에 짙은 화
장을 한 아가씨들이 하나,  둘 밤하늘의 별처럼 깜박거렸다. 긴자에 인접해 있는
유라쿠초(有樂町)는 지금도 도쿄에서 손꼽히는 번화가이다.  불빛이 명멸했다. 여
기저기서 성냥을 켜대는 소리에 이어 잠깐 동안 불꽃이 어둠을 밀어내면 아가씨
들은 허벅지가  확연히 드러나도록 스커트  자락을 걷어 올렸다.  <저런, 속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구나!> 손님은 성냥 한 개비가 타는 동안 구경하고 몇 푼
을 주면 되었다.  킬킬거리는 미군 병사들의 웃음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성냥 불
빛 아래서 잠깐 눈요기를 시켜 주고 돈을 벌어야 했다. <노예가 되는 날 인간성
의 반을 잃어버린다>는  고대 그리스 격언대로, 돈의  노예가 되면 수치고 뭐고
없는 법이다. 그 푸른  지폐에는 <나는 신을 믿는다>라고 적혀 있다. 성냥 불빛
아래의  일본 여자들은  돈이 곧  신이라는 배물주의에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도 통계를 보면, 수출 5역 달러, 수입 9역 달러로서 4억 달러 정도의 무역
적자였다. 한푼의 외화가 아쉬운  때였다. 외화 가득률 최고의 상품은 예나 지금
이나 성(성)이다. 외화벌이에 나선 여자들이 7에서 8만 명에 달했으면 이들이 벌
어들인 돈이 연간 7천만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무역 적자의 20퍼센트 가까이를
여자들이 육체전선에서 벌어들인 셈이었다.  혹자는 이 매춘부들은「정숙한 일본
여성들의 방파제로 희생당하고 있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하였다. 일본이
1964년도 도쿄 올림픽 유치활동을  하면서 가장 골치 아파했던 사회문제가 바로
득실거리는 매춘부 처리 문제였다.  시내 중심가는 물론 온천 지대, 역부근에 넘
쳐나는 매춘부를  어떻게 하지 않고서는  올림픽을 유치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미군 부대가 이동하면 민족의  대이동을 방불케 하는 매춘부 행렬이 뒤따랐다고
당시의 신문들은 개탄하고 있다. 패전 후 일본  여성의 자존심은 완전히 땅에 떨
어졌었다. 상처받은 일본  여성의 자존심을 하루 아침에 되살려 준  쾌거가 1959
년에 있었다. 고지마 아키코(兒島明子)라는 22세의 패션모델 출신의 아가씨가 미
스 유니버스에 뽑힌 사건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
미(大照大神) 이래,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감격했다. 식량  위기와 영양 실조로 표
현되는 참담한 전후 시대를 마감하고 마침내 자존심과 고전적인 일본의 미를 되
찾았다고 법석을 떨었다. 고지마 아키코는 초대형  팔등신 미인으로 일본 열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태양의 여신을 들먹일 만했다. 일본인들은 전쟁의 잿더미 속
에서 눈부시게 피어난 한송이 야마토 패랭이꽃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미
국 아파트, 중국 요리, 일본인 아내」가  인생 최상이라는 국제적 전설이 있었다.
일본여성의 아름다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과 고풍스러운 자
태의 일본 여인상  때문이다. 그러나 미스 유니버스로 선발된 그녀는  세계적 수
준의 미인이라고 자랑이 대단했다. 아키코가 미스  유니버스에 뽑힌 데는 일본의
전통적 의상인 기모노가 톡톡히 한몫을 했다.  동양적 고전미에다 서구적 여성미
가 조화를 이루어  낸 이국적 정서에 심사위원들이 홀린 것이  아니었을까. 1959
년을 계기로 일본 여성도 국제 미인 대회  규격에 근접해 갔다. 다다미 생활에서
해방되어 의자 생활로 바뀌고  스포츠와 식생활 혁신으로 일본인의 체위가 급격
히 신장했다. 일본  숙녀들은 유라쿠초 별들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먼  별나라 전
설처럼 여기고 고도경제 성장의 길목에서 각선미와 체중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
다. 일본  여성들의 가슴둘레가 여자들의  콧대가 높아진 것과  더불어 커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 여성내의 유명 메이커가 지난  20년간 여성 신체 치수를 계
측한 결과 가슴둘레가 커지고 힙의 위치가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A
컵 사이즈의 브래지어 생산이 중단된지 이미 오래되었고 요즈음에는 C컵이 평균
적이라고 한다.  고도 경제성장과 가슴둘레는 정비례하는가?  패전으로부터 불과
50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은 세계  최대의 원조국으로서 세계 GNP의 15퍼센트를
차지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방위비 지출이 연간 약 400억 달러로 미국, 러
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불과 GNP 1퍼센트만을 방위비로
지불하는데도 세계 3위라는 사실이다. 절치부심한 결과이다. 한국 동란과 월남전
특수에다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안보를 거의 공짜로 보장받으며 냉전 구도의 혜
택을 톡톡히 본 것을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오늘날의 경제대국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한강의 기적」이 우리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라고 한다면  저들의 성
장도 일본인 특유의 분발  정신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전후 7년  2개월 간의 총
리를 역임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미국이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지금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었듯이, 일본도 미군의  점령군 통치를 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경제적으로 미국을  능가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모든 것을  참고 와
신상담하는 자세로 분발하자고 채근했다. 일본 여성은 약해 보인다. 그러나 지독
하고 모진 데가  있다. 그들은 감정 표현을 극도로 억제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잘 안 드러낼 뿐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일본 여자  배구팀이 강호 소련팀
을 격파하여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일본 선수들은「동양의 마녀   」라는 애칭
을 얻었는데, 이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 일본  여성의 저력에 대한 평가를 상징적
으로 나탄낸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일본 여성들 사이에 해외 여행
이 일종의 붐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
직해도 월급이 20만엔이  채 안된다. 160만원 정도 되나 일본의  높은 물가를 고
려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일본 여자들은  경제 관념에 밝으며  대단히 검소한
편이다. 미혼의  여성들도 번 돈을  알뜰하게 관리하여 좋아하는  해외 여행길에
나선다. 흥청망청 낭비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저축 정신이 아주 강하고 생활
이 계산적이며 설계적이다. 1992년 일본의 총저축액은  전세계 저축액의 4분의 1
에 해당하는 6,814억 달러로서 세계 제 1위이다. 일본 여성들의 높은 저축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의 진정한 저력의  원천은 여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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