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탈혼_by 성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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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탈혼
  원시 사회 모계 씨족이 해체되고 부계  씨족 사회로 향하는 과도기 때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
사에 따라 남자 쪽 씨족으로 출가한  것이 아니라 강제성을  지닌 겁탈혼의 방식으로  결혼했다.
겁탈혼이 원시 사회의 부계 씨족 시대에 나타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이 시대 남성은 주요한 생
산 노동력인 데 비해 부녀자의 지위는 내려갔다는 데 있고, 둘째는  여자는 일단 성인이 되면 가
정을 노동력이며, 씨족 재산의 일부분이었기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역경]의 다음 문장은 겁탈혼에 관한 것이다.
  i) 이 여자를 취하지 마소/ 미모의 낭군만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네
  ii) 나가지 못하고 방황한다/ 말을 탄 사람이 오는데/ 도적이 아니라 좋은 짝이라네
  iii) 말을 타고 와/ 피눈물을 주룩주룩 흘린다.
  위 글에서는 남자가 위풍당당하게 말을 달려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 여자를 납치하듯 데리고 나
오고, 여자는 상심하여 우는 모습을 묘사했다.  어떤 이들은 이처럼 말을 타고  배회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은  여자를 겁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혼을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기도  했
다. "도적이 아니라 좋은 짝이라네"는 [주역]에 흔히 보이는 말이다. "강도가아니면   자기 결혼
상대로 좋다. 이전에 (음양  화합의)비를 만난 적이 있으면  길하다"는 말도 보인다. 그런데  비
를 만나면 왜 길하다고 하는가?  여자를 겁탈한 후 비가 내리면 빗물에  족적이 사라져 상대방이
쫓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의 문장들은  강도가 신부를 탈취하는 일은  캄캄한 밤에 가능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공자가 시집간 여자의 집에서는  사흘 밤 촛불을 끄지 않아 서로 떨어지는  것을 생각하고,  부
인을 얻은 집은 사흘간 음악을 하지 않아 친부모를 생각한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혼례는 축하
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결혼 소식이 누설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 등도  겁탈혼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겁탈혼의 의미는 "혼인"이라는  개념, 즉 "혼이란 어두울 때 예를  행하기 때문에 혼이라
고 한다. 인이란 부인이  남편으로 인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이라 하는"것과  밀접하다. 또 [설
문]에서는 "부인을 얻는 것이 저녁 때이기 때문에  혼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혼인이 황혼
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저녁이 되어서야 혼례를 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동한의 정현은 "혼인 방법이란 가취의
예를 가리키며," "남편을 혼이라 하고,  아내를 인이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공영달은 "남자
는 황혼 무렵에 여자를  맞이하고, 여자는 남자를 따라온다...남녀의  몸을 논하여 가취라고  하
는것은 아주 알맞게 결합할 때를  가리키며, 이것을 혼인이라고 한다. 이 일은  한 가지뿐이므로 
"혼인 방법이란 가취의 예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아]는 남녀 부모에 의거한 것이
며, 이것은 남녀의 몸에 근거하여 남편은 황혼  무렵에 맞이하고, 아내는 이로 인해 따라간다.그
래서 남편을 혼이라 하고, 아내를 인이라 한 것이다"라고 했다.
  겁탈혼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같은 씨족의 여자를 겁탈하여 아내로 삼는  것이
며, 또 다른 하나는  원시 사회 부락간의 전쟁에서 상대 씨족  부락의 부녀자를 약탈하여 전리품
으로 삼은 후, 자기 씨족  부락의 남자에게 분배하여 아내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역경]이전에
도 겁탈혼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보인다. [사기, 하본기]에는, 예가 하대 네번째 군주의 왕위
를 차지한 후, 한착이 예를 죽이고 예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내용이 보이고, [국어, 진어칠]에는
하걸이 유시씨를 공격하자, 유시씨는 미녀를  하걸에게 바쳐 첩을 삼게 함으로써  강화를 맺었다
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은 초기 겁탈혼의 두 가지 기본  방식, 즉 첫째는 무력으로
겁탈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규모의 무력의 부산물임을 대표한다.
  개인이 무력으로 부녀자를 약탈하여 첩으로 삼는 것은 춘추 시기 이전의 문헌에서도 더러 보인
다. 이 가능성은 노예주에게  있어 그들이 고용하고 있는 신하나 노예는 사람들에게  내재된  일
체의 권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부녀자를 약탈하여 첩으로  삼는 일은 결코 특별
한 일이 아닌 것이다. 가령 송나라  태재 화부독은 길에서 사마 공부가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는
데,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해  공부가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첩으로 삼았으며,  노장
공은 궁궐 안의 높은 누대에서 당씨 집의 미모의 여자를 발견하고는 유부녀임에도 불구하고 겁탈
하여 첩으로 삼았고, 초나라 공자 재는 영윤의 지위에 있을 때, 대사마의  처첩이 자기의 처첩보
다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자, 대사마를 죽이고  그의 처첩과 재산을 전부 몰수하여  자기의 소유
로 했다. 그리고 적나라 사람이  장구여라는  부락을 정벌하여 얻은  숙외, 계외라는 두 여자를  
 
공자 중이에게 보낸 것 또한 겁탈혼의 한 예이다. 그리고 초나라 왕은 식나라를 멸하고  그 왕의
아내 규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취했으며, 초나라 성왕은 정나라를 구해  주고 정나라  군주의
두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돌아갔고, 진나라는  제후들을 평정할 때마다 그  나라의 궁실을 모방
하여 함양의  북쪽 산기슭에 지어 제후들에게서  빼앗을 미안과 종고로 가득메웠다.  또 한문제
의 생모 박희는  본래 위나라 왕 표의 여자였는데, 한신의 포로가 되어 한고조의 여자가 되었다.
또 견후는 본래 원소의 며느리인데, 조조는 원소를 멸망시키고 그녀를  차지했다. 이처럼 적군의
여자를 약탈하는 일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정신적인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겁탈혼은 세력이 강한 자가 그보다 못한 상대방에게 여자를 바치도록 협박하는 형태
로 변 갔다. 이 점에서 한대의 "화진"은  상고 시대 겁탈혼의 맥을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겁탈혼 풍속은 한조의 역사 발전과 더불어 점점 사라졌지만, 소수 민족들에게서는 여전히 성행
했다. 한대 북부 변방 지역의 오환족은 "먼저 여자를 약탈하여 정을  통하고" 동거하다가 반년이
나 100일이 지난 후, 소,  말, 양을 처가로 보내 빙례로 삼았다.  그런 연후 남자는 여자를 따라
여자 쪽 집으로 가서 1년 혹은 2년간 함께  산다. 그 후 여자 집에서는 집이나  결혼 용품  등과
함께 딸을 준다. 오환족의 이러한 풍속은 겁탈혼이면서도 복역혼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토곡혼
족의 결혼은 빙재를 후하게 하지만 결혼 방식만은 겁탈혼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여하튼 겁탈혼이란 남자가 무력으로 여자를  겁탈하여 강제로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 "약탈혼", "양전혼"이라고도 하며, 고대 씨족 부락의 외혼제의 유속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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